
"그 사람을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덜 힘들었을까?" 이별 후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이 상상을 영화로 만든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2004년 개봉한 <이터널 선샤인>입니다. 헤어진 연인과의 기억을 모두 지우려 했던 남자가 추억이 사라지는 순간 오히려 그 기억을 지키려 발버둥치는 이야기인데요. 저도 힘들었던 이별을 겪은 후 이 영화를 보면서, 제 과거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기억을 지우고 싶었던 순간, 조엘의 선택
영화는 조엘이라는 남자가 회사에 가는 대신 갑자기 몬톡 행 열차를 타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클레멘타인이라는 여자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게 끌리는 두 사람. 하지만 이 만남이 사실은 '두 번째'였다는 게 나중에 밝혀집니다. 클레멘타인은 이미 조엘과 사귀었다가 헤어진 후, 라쿠나라는 회사를 통해 조엘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삭제했던 겁니다.
충격을 받은 조엘도 결국 같은 선택을 합니다. 집에 남아 있던 클레멘타인과의 물건들을 모두 가져가 기억 삭제 시술을 받기로 한 거죠.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제가 힘들었던 이별 직후의 심정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정말로 그 사람과의 시간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조엘의 선택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도 저런 기술이 있다면 당장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시술이 시작되고 조엘의 기억은 가장 최근의 이별 순간부터 하나씩 지워집니다. 서로 상처 되는 말을 주고받았던 날, 싸우기만 했던 날들이 먼저 사라지죠. 기술자들은 담담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조엘은 잠든 채로 자신의 기억이 소멸되는 걸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조엘은 점점 이상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 깨달은 것
기억이 지워지면서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싸웠던 순간뿐 아니라 함께 웃었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들도 함께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평범한 오후, 빙판 위에 누워 장난치던 겨울날, 말없이 손을 잡고 걷던 해변가. 이런 기억들이 희미해지자 조엘은 잠든 상태에서도 필사적으로 저항합니다. "이 기억은 지우고 싶지 않아"라고 외치면서 말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보면서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건, 저 역시 힘들었던 관계를 떠올릴 때 나쁜 기억만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함께 웃었던 순간도 많았고, 그 사람 덕분에 성장한 부분도 분명히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별의 아픔이 너무 커서 좋았던 기억까지 덮어버렸던 거죠. 영화 속 조엘처럼, 저도 그 기억을 지운다면 제 일부도 함께 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엘은 기억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데리고 기술자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칩니다. 클레멘타인이 없었던 어린 시절 기억 속으로 숨기도 하고, 부끄러워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창피한 기억 속으로 달아나기도 하죠. 이 과정에서 조엘은 클레멘타인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다시 느끼게 됩니다. 싸움도, 상처도 모두 그들의 관계를 구성하는 일부였다는 걸 비로소 이해한 겁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그래도 다시 선택하는 이유
영화 말미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가 과거에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연히 손에 들어온 녹음테이프를 통해 서로가 얼마나 싸웠는지, 왜 헤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듣게 되죠. 클레멘타인은 "우리 또 똑같이 될 거야"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엘은 "괜찮아"라고 대답합니다.
이 장면이 제게는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엘은 앞으로도 클레멘타인과 다툴 수 있고, 또다시 힘들어질 수도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선택하는 거죠. 이건 무모함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관계는 없고, 상처받지 않는 사랑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이 진짜 사랑인겁니다.
저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제가 힘들어했던 그 관계는 제게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줬고, 제 한계를 마주하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더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줬습니다. 만약 그 기억을 지워버린다면, 그 시간 동안 성장한 제 모습도 함께 사라지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과거를 부정하기보다 받아들이려고 노력합니다. 아팠던 기억도, 좋았던 기억도 모두 저를 만든 일부기 때문입니다.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빙판에 누워 하늘을 보던 장면처럼, 겨울은 추억을 되돌아보기 좋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이터널 선샤인은 단순히 슬픈 로맨스 영화가 아니라, 사랑과 기억, 그리고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상처받더라도 함께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를 찾고 있다면, 이 작품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