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장을 잃고 나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혼잣말을 해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있습니다. 그 말이 위로인지 변명인지 구분이 안 될 때가 있었는데,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나서야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실감했습니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9분간 기립박수를 받은 이 작품, 도대체 뭐가 그렇게 관객을 붙잡는 걸까요?
중년 가장의 몰락, 낯설지 않은 배경
영화는 파란 하늘 아래 넓은 마당에서 바베큐를 즐기는 한 가족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아름다운 아내, 사랑스러운 아이들, 반려견까지. 유만수라는 인물이 20년 넘게 쌓아온 삶의 결실이 한 프레임 안에 담깁니다. 저도 그 장면을 보면서 "저게 바로 사람들이 꿈꾸는 그림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 정점이었습니다. 미국계 사모펀드(PEF)가 만수가 몸담았던 태양 제지를 인수하면서 구조조정의 칼날이 내려옵니다. 여기서 사모펀드란 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아 기업을 인수한 뒤 비용을 줄이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투자 기구를 말합니다. 20년 경력, 올해 펄프맨상 수상, 그 어떤 것도 방패가 되지 못했습니다. 경력이 길다는 건 연봉이 높다는 뜻이고, 연봉이 높다는 건 해고 1순위라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실제로 국내 고용 시장에서 40~50대의 비자발적 이직 비율은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중고령층 근로자의 조기 퇴직 문제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적 현상이라는 점을 영화는 조용히 짚어냅니다. (출처: 한국고용정보원).
만수가 다른 선택지를 외면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집을 팔고 아파트로 이사할 수도 있었고, 아내의 커리어를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선택들이 자신이 지켜온 삶의 형태에서 멀어지는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그래서 위험합니다. 그 말이 합리화의 주문이 되는 순간, 사람은 무섭도록 좁은 선택지 안에 스스로를 가둬버립니다.
박찬욱 미장센이 만들어낸 공간의 언어
영화를 보면서 제가 가장 먼저 느낀 건 공간이 인물을 설명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만수의 저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살고 싶었던 집, 직접 손보고 온실을 짓고 구석구석 채워 넣은 그 공간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정체성입니다. 이 집이 진실이 폭로되는 무대가 되는 순간, 관객은 단순히 사건을 보는 게 아니라 한 인간의 붕괴를 목격하는 기분이 듭니다.
박찬욱 감독이 이처럼 건축 공간을 영화적 서사 도구로 활용하는 건 우연이 아닙니다. 건축학 교수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그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독일 표현주의 영화 미학에서 말하는 미장센(mise-en-scène)이라는 개념이 여기서 핵심입니다. 미장센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 요소, 즉 조명, 공간, 배우의 위치, 소품까지를 아우르는 연출 개념으로, 카메라가 찍기 전에 이미 화면 안의 세계를 설계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이 영화에서 도끼(axe)는 그 미장센의 중심 상징입니다. 도끼란 영어로 'axe'라 하는데, 미국에서는 직원을 해고하는 것을 "도끼질(getting the axe)"이라고 표현합니다. 영화는 이 이중적 기호를 의도적으로 반복하면서 해고와 살인 사이의 경계를 흐립니다. 제가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렇게 단순한 소품 하나가 영화 전체의 주제를 압축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거든요.
영화 속 주요 공간과 그 상징성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만수의 저택: 자아와 정체성의 공간. 진실이 폭로되는 최후의 무대
- 최선출의 집: 성공한 경쟁자의 공간. 만수의 욕망과 타락이 동시에 드러나는 장소
- 고시조가 일하는 신발 가게: 몰락한 동료의 공간. 만수 자신의 미래를 비추는 거울
이병헌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병헌의 연기를 보러 갔다가 영화 자체에 깊이 빠졌습니다. 유만수라는 캐릭터는 흔히 말하는 알파메일(alpha male), 즉 집단 내에서 지배적 위치를 점유하려는 성향의 남성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은 압박 앞에서 가치 없이 무너지고, 상황을 수습하기는커녕 악화시키는 방향으로만 행동합니다. 그 아이러니를 이병헌은 카리스마를 드러내는 순간과 그것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을 정밀하게 교차시키면서 표현합니다.
캐릭터 아크(character arc)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캐릭터 아크란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인물의 내면이 변화하는 궤적을 의미하는데, 유만수의 아크는 상승이 아니라 하강입니다. 그런데 그 하강이 전혀 공감이 안 가는 방향이 아닙니다. 행동은 이해할 수 없지만 동기는 이해 가능한 그 경계를 유지하는 것, 이게 이 연기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손예진이 연기한 아내 미리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영화의 정서적 중심 역할을 하면서도,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하고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실질적인 결단을 내리는 인물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캐릭터는 자칫 '현명한 조력자'로만 소비되기 쉬운데, 손예진은 그 안에 쫀쫀한 균열과 감정을 담아냅니다. 전화가 울릴 때마다 화들짝 놀라는 남편을 들었다 놨다 하면서도 자신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그 긴장감이 느껴졌습니다.
영화 속 구범모, 고시조, 최선출 세 인물 모두 수십 년을 종이업계에서 버텨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만수처럼 몰락의 언저리에 서 있다는 점은 단순한 경쟁 구도가 아니라 시스템이 낳은 비극임을 드러냅니다. 노동시장에서 숙련 노동자(skilled worker)가 연령을 이유로 배제되는 현상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OECD에 따르면 55세 이상 고령 근로자의 고용률 격차는 회원국 전반에서 지속적인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출처: OECD).
극장에서 나오면서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또 언제 스스로에게 했는지 생각이 났거든요. 영화는 그 말이 면죄부가 아니라는 걸 담담하게, 그리고 잔인하게 보여줍니다. 박찬욱 감독의 전성기는 분명 아직 끝나지 않았고, 이 작품은 헤어질 결심과는 또 다른 결의 상처를 남깁니다. 극장에서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분명히 말수가 줄어들 겁니다.